역시 예전에 올렸던 기사 입니다.
일본 공식 깁슨 펜페이지의 기사구요, 직접 번역 했습니다.
조만간 휀더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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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폰이 대체 뭐지?
이 알수없는 이름은 어디서 온것일까..
에피폰과 깁슨은 대체 어떤 관계?
먼(?) 옛날, 에피폰과 깁슨은 엄청난 라이벌 관계였습니다. 의외로 알려지지 않은 에피폰의 수수께끼와 진실! 기타팬이라면 Epiphone Story를 읽어 모두에게 쫌 아는척을 합시다. ㅎㅎ
에피폰의 기원은, 그리스 출신의 아나스타시오스 스타트포우로가, 뉴욕의 작은 공장을 세웠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스타트포우로의 집」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공장에서는, 바이올린이나 류트, 그 외의 그리스 악기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21 세기에 접어들 무렵에는, 당시 인기가 높았던 만돌린의 제작을 하는 것과 동시에, 아들인 에파미논바스(그의 별명은"에피") 를 사업에 참가시켰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는 무렵에는 재즈가 대 유행해, 밴조의 제작이 활발하게 되었다. 현지에서 음악 활동을 하고 있던 에피는, 그 지식을 쏟아부어 테너·밴조류의 제작을 시작해 크게 성공한다. 실제, 에피의 디자인워크는 참신해서 밴조 설계로 여러종류의 미국 특허를 취득했다. 그 중에 가장 낡은 것은 1917년, 에피가 24세 때의 것이었다.
1928년에는, 회사명을"에피폰"에 개칭한다.
이것은, 자신의 별명인"EPI"에, 희랍어로 「소리」를 의미하는"PHONE"를 붙인 것이다.
그 무렵부터 에피폰은, 「레코딩 시리즈」라고 이름을 붙인 기타의 제작을 시작한다.
기타의 인기가 상승하여 상품 수요가 증가하는 중에, 「마스터 빌드·시리즈」를 발표.
에피폰은, 깁슨이 그 무렵 팔기 시작한 「마스터 톤 시리즈」의 대항기종으로 여겨진 이래, 에피폰과 깁슨은 모델의 최신화 및 대형화를 통해 서로 경쟁하는 경쟁자가 된다.
깁슨이 18 인치폭(당시 최대)의 바디를 가지는 「슈퍼 400」을 팔기 시작하자, 에피폰은 그것을 웃도는 18.5 인치의 「임페러」를 발표해 대항한다. 깁슨의 캐치프레이즈인
"오직 깁슨만이 힘이 되어준다"에 대해서, 「힘이 되는 것이 믿음직스럽지 못할 때에는···.」라고 응수 했다. 이러한 라이벌 관계는, 1930년대부터 1940년대에 걸쳐 계속되었다.
기타 제작의 황금 시대를 통해서, 에피폰은 기타 혁신의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예를 들면, 일렉트릭 기타에 톤컨트롤을 처음 채용하고, 첫 더블 넥 현악기, 넥 엔드로 조정 가능한 트러스 로드, 톤 익스프레서(와우페달의 전신), 볼륨 페달, 또 전자 튜너등을 들 수 있다.
1941년에는, 레스폴(당시 , 가장 인기가 있던 기타리스트)이 솔리드바디 기타의 실험을 시작해 뉴욕의 에피폰 팩토리로 시제품의 생산을 개시했다. 현재, 역사적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유명한 기타의 하나인 레스폴의 「로그」는, 그가 에피폰 공장에서 에피폰의 파트를 다량 사용해 완성시킨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에 의해, 기타부터 시작해서 전쟁에 관계없는 제품의 생산은 모두 정지되어 공장에서는 전시 물자의 생산을 했다. 1945년, 에피는 병에 쓰러져 그 해의 6월 6일에 죽었다. 그 후, 에피폰은 노동쟁의,"Conn Company"에 의한 매수와 공장 이전에 의한 큰 피해에 직면했다. 1957년에는 에피폰기타는 깁슨사에 매수되어 칼라마즈 공장에서 제작되게 되었다. 그 후에도 에피폰은 깁슨 제품의 라이벌 모델로서 자리매김되어 왔다.
기본적으로 같은 생산 라인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에피폰도 깁슨도, 그 품질은 동등의 것이었다. 또, 에피폰의 모델은, 깁슨에 비해, 인레이등의 장식에 열중하고 있었다.「ES-225」의 대항기종으로서 「쉐라톤」이, 「ES-330」에 대해서는 「카지노」, 솔리드 바디의 쥬니어·시리즈에는 「올림픽」이나 「클로넷」이 제작되었다.
에피폰에 있어 큰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비틀즈의 3명의 기타리스트 전원이 에피폰을 사용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많은 아티스트에게 연주된 악곡으로서 기네스 북에도 실리는 명곡 「예스터데이」는, 폴 매카트니가 에피폰의 「텍산」을 사용해 작곡 한 것으로, 그는 이 곡의 레코딩이나 스테이지에서도 「텍산」을 사용했다.또, 「카지노」를 3명 모두 애용하고 있어, 비틀즈의 중기 이후에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1970년 이후, 에피폰의 생산공장은 일본에 옮겨졌다. 저가격 그리고 고품질.
일본의 공장에서 만들어진 첫미국 기타브랜드가 에피폰이었다. 1982년경에는 한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각국의 공장에서 생산을 개시. 1986년에는 헨리-·져스코 위트와 데이브 베리먼이 깁슨사를 매수. 에피폰과 깁슨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1995년에는 테네시주 네쉬빌의 깁슨 공장의 근처에 사무실와 창고가 설립되었다.
현재 에피폰은, 에피폰의 역사적 명기와 깁슨의 명기들을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하는"에피폰"과, 오리지널과 같은 컨셉을 "Made in Japan"의 품질로 승부하는"에피폰 저팬(Epiphone Japan)"을 생산하고 있다.
일본 공식 깁슨 펜페이지의 기사구요, 직접 번역 했습니다.
조만간 휀더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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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폰이 대체 뭐지?
이 알수없는 이름은 어디서 온것일까..
에피폰과 깁슨은 대체 어떤 관계?
먼(?) 옛날, 에피폰과 깁슨은 엄청난 라이벌 관계였습니다. 의외로 알려지지 않은 에피폰의 수수께끼와 진실! 기타팬이라면 Epiphone Story를 읽어 모두에게 쫌 아는척을 합시다. ㅎㅎ
에피폰의 기원은, 그리스 출신의 아나스타시오스 스타트포우로가, 뉴욕의 작은 공장을 세웠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스타트포우로의 집」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공장에서는, 바이올린이나 류트, 그 외의 그리스 악기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21 세기에 접어들 무렵에는, 당시 인기가 높았던 만돌린의 제작을 하는 것과 동시에, 아들인 에파미논바스(그의 별명은"에피") 를 사업에 참가시켰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는 무렵에는 재즈가 대 유행해, 밴조의 제작이 활발하게 되었다. 현지에서 음악 활동을 하고 있던 에피는, 그 지식을 쏟아부어 테너·밴조류의 제작을 시작해 크게 성공한다. 실제, 에피의 디자인워크는 참신해서 밴조 설계로 여러종류의 미국 특허를 취득했다. 그 중에 가장 낡은 것은 1917년, 에피가 24세 때의 것이었다.
1928년에는, 회사명을"에피폰"에 개칭한다.
이것은, 자신의 별명인"EPI"에, 희랍어로 「소리」를 의미하는"PHONE"를 붙인 것이다.
그 무렵부터 에피폰은, 「레코딩 시리즈」라고 이름을 붙인 기타의 제작을 시작한다.
기타의 인기가 상승하여 상품 수요가 증가하는 중에, 「마스터 빌드·시리즈」를 발표.
에피폰은, 깁슨이 그 무렵 팔기 시작한 「마스터 톤 시리즈」의 대항기종으로 여겨진 이래, 에피폰과 깁슨은 모델의 최신화 및 대형화를 통해 서로 경쟁하는 경쟁자가 된다.
깁슨이 18 인치폭(당시 최대)의 바디를 가지는 「슈퍼 400」을 팔기 시작하자, 에피폰은 그것을 웃도는 18.5 인치의 「임페러」를 발표해 대항한다. 깁슨의 캐치프레이즈인
"오직 깁슨만이 힘이 되어준다"에 대해서, 「힘이 되는 것이 믿음직스럽지 못할 때에는···.」라고 응수 했다. 이러한 라이벌 관계는, 1930년대부터 1940년대에 걸쳐 계속되었다.
기타 제작의 황금 시대를 통해서, 에피폰은 기타 혁신의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예를 들면, 일렉트릭 기타에 톤컨트롤을 처음 채용하고, 첫 더블 넥 현악기, 넥 엔드로 조정 가능한 트러스 로드, 톤 익스프레서(와우페달의 전신), 볼륨 페달, 또 전자 튜너등을 들 수 있다.
1941년에는, 레스폴(당시 , 가장 인기가 있던 기타리스트)이 솔리드바디 기타의 실험을 시작해 뉴욕의 에피폰 팩토리로 시제품의 생산을 개시했다. 현재, 역사적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유명한 기타의 하나인 레스폴의 「로그」는, 그가 에피폰 공장에서 에피폰의 파트를 다량 사용해 완성시킨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에 의해, 기타부터 시작해서 전쟁에 관계없는 제품의 생산은 모두 정지되어 공장에서는 전시 물자의 생산을 했다. 1945년, 에피는 병에 쓰러져 그 해의 6월 6일에 죽었다. 그 후, 에피폰은 노동쟁의,"Conn Company"에 의한 매수와 공장 이전에 의한 큰 피해에 직면했다. 1957년에는 에피폰기타는 깁슨사에 매수되어 칼라마즈 공장에서 제작되게 되었다. 그 후에도 에피폰은 깁슨 제품의 라이벌 모델로서 자리매김되어 왔다.
기본적으로 같은 생산 라인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에피폰도 깁슨도, 그 품질은 동등의 것이었다. 또, 에피폰의 모델은, 깁슨에 비해, 인레이등의 장식에 열중하고 있었다.「ES-225」의 대항기종으로서 「쉐라톤」이, 「ES-330」에 대해서는 「카지노」, 솔리드 바디의 쥬니어·시리즈에는 「올림픽」이나 「클로넷」이 제작되었다.
에피폰에 있어 큰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비틀즈의 3명의 기타리스트 전원이 에피폰을 사용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많은 아티스트에게 연주된 악곡으로서 기네스 북에도 실리는 명곡 「예스터데이」는, 폴 매카트니가 에피폰의 「텍산」을 사용해 작곡 한 것으로, 그는 이 곡의 레코딩이나 스테이지에서도 「텍산」을 사용했다.또, 「카지노」를 3명 모두 애용하고 있어, 비틀즈의 중기 이후에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1970년 이후, 에피폰의 생산공장은 일본에 옮겨졌다. 저가격 그리고 고품질.
일본의 공장에서 만들어진 첫미국 기타브랜드가 에피폰이었다. 1982년경에는 한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각국의 공장에서 생산을 개시. 1986년에는 헨리-·져스코 위트와 데이브 베리먼이 깁슨사를 매수. 에피폰과 깁슨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1995년에는 테네시주 네쉬빌의 깁슨 공장의 근처에 사무실와 창고가 설립되었다.
현재 에피폰은, 에피폰의 역사적 명기와 깁슨의 명기들을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하는"에피폰"과, 오리지널과 같은 컨셉을 "Made in Japan"의 품질로 승부하는"에피폰 저팬(Epiphone Japan)"을 생산하고 있다.